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강의 변 (문단 편집) === 발단 === 1115년 [[요나라]]의 지배를 받던 [[여진족]]의 [[태조(금)|완안아골타]]가 통일국가 금을 건국하고, 당시 막장 상태였던 [[요나라]]를 말 그대로 [[개박살]]내기 시작하자,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에게 바치던 공물을 금에게 바치면서 협공을 제의했다. 물론 금 입장에서도 손해볼 것이 없는 제안이라 금은 이를 수락했다. 이 동맹 소식을 들은 [[고려]] 측은 여진족은 거란족과 뿌리가 별반 다르지 않아 그 신뢰성 또한 마찬가지라며 여진족과 손잡아선 안 된다고 조언했으나 송은 이를 무시했다. 당시 휘종과 [[송나라]] 조정은 [[이이제이|여진을 이용해 거란을 제압하고]], 숙원인 [[연운 16주]]를 회복하여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생각이었다. 그러나 당시의 송군은 병력만 많았을 뿐 내부적인 여러 문제로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. 북송의 문치 위주 통치 방식은 내부적으론 호황기를 가져왔으나 외부적으론 군의 지나친 영향력 약화도 가져왔고, 전시 상황에서도 군대가 중앙정부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. 거기에 북송은 [[방랍의 난]]을 간신히 진압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멸망 테크를 타던 요나라조차 이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. 또한 송은 금나라로부터 협공하기로 약속받은 뒤에도 한창 무너지던 요나라를 상대로도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. 심지어 이때 당시의 요군은 제대로 된 군대도 아니고, 금나라의 침략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수군(瘦軍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는 군대라는 뜻)이라는 임시 군대에 불과했다. 문제는 이런 수천 명의 수군한테 무려 10만 명의 송군이 패배하고 쫓겨났으니, 이 당시 송군의 전투력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. 협공하자고 해놓고 정작 제대로 된 승전을 하나도 못거둔 송나라의 행태를 본 금은 당연히 분노할 수 밖에 없었고, 송나라가 일부러 진군을 늦추고 금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여, 바로 사신을 보내 송에 항의하였다. 송은 연주 6주([[북경|송의 연산부]])의 토지만 챙기는 대신, 연주 내의 모든 재물과 금이 공략한 운주(현 [[다퉁]]) 10주를 양도하고 공물을 더 바치는 조건을 제시하여 숙이고 들어갔다. 금도 이런 송의 태도에 만족해 화를 풀면서 당장의 갈등은 해소되었다. 그렇게 1125년 요나라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 속에 마지막 황제였던 [[천조제]]가 금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금나라의 수도로 압송되고, 남은 잔당 세력은 서쪽으로 튀면서 카라 키타이/[[서요]]가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